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오시프 스탈린/생애 (문단 편집) == 권력을 획득하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10px-Ordzhonikidze%2C_Stalin_and_Mikoyan%2C_1925.jpg|width=100%]]|| || 1925년의 캅카스 3인방이라 불리었던 3명의 사진. 좌측부터 아나스타스 미코얀[* 그의 동생인 아르툠 미코얀은 미하일 구레비치와 함께 [[미그]] 사를 창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본인도 1930년대에 무역장관으로 활약했으며 이때 [[도넛]]이나 [[팝콘]] 등의 서방 음식을 소련에 소개, 도입하기도 했다.], 이오시프 스탈린, 세르고 오르조니키제.[* 생몰년도 : 1886년 10월 24일 ~ 1937년 2월 18일, [[조지아]] 출신의 혁명가로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 몸담았으며 스탈린의 최측근이었다. [[대숙청]] 당시 숙청 위기에 몰리자 자살했으며, 덕분에 본인은 [[크렘린 벽 묘지]]에 묻혔고 두 형과 큰 형의 형수가 사형당한 것을 제외하면 다른 가족들은 목숨을 부지했다. 다만 자살한 게 맞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 캅카스 지역의 [[멘셰비키]]에 대한 열렬한 투쟁으로 캅카스의 레닌이란 별명도 얻었고, 1910년대 어간에 [[프라우다]] 창간에 참여하여 첫 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중앙위원에 선출될 정도로 세간의 인식과 달리 혁명가로써 두각을 보이던 스탈린이었지만, 오흐라나에게 체포되면서 그의 혁명가 이력은 한 방에 훅 갈 위기에 처한다. 시베리아 한복판에 끌려가 무려 4년이나 썩어야 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신검까지 끌려가 러시아 제국군에 징집될 위기에 처했다가 왼팔 부상 때문에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 와중에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터지고, 제국 정부가 무너진 후에야 시베리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그 중요한 제국 붕괴 시기에 스탈린이 한 일이 없었던 것은 당연했고 그 영향으로 스탈린은 10월 혁명에 대한 유명한 미국인 사회주의자 [[존 리드]]의 르포 <''세계를 뒤흔든 열흘(Ten Days That Shook the World)''>에서도 이름만 겨우 두 번 언급될 정도였다.[* 이에 반해 레닌은 물론 트로츠키나 지노비예프는 거의 매 장마다 언급되는데,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 책에 자신의 이름이 많이 나오지 않고 레온 트로츠키의 이름이 더 많이 나왔다는 이유로 레닌이 만국의 노동자들로 하여금 읽으라고 서문을 써 준 이 책을 '''금서'''로 만들어서 소련 인민의 접근을 차단했다.] 거기에 4년이 넘는 시베리아 유형 사이에 스탈린은 완전히 잊혀서 명색이 전직 중앙위원인데도 인정받지 못하고 중앙위원회에서 일했던 사람 정도로 소개받아 말단 취급을 받는 굴욕을 당했다. 보다 못한 [[블라디미르 레닌|레닌]]이 스탈린의 신원을 보증해줬을 정도.[* 사실 레닌조차 스탈린의 이름을 잊어먹고 그의 별명인 '코바'만 기억하고 있어서 "코바의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나는 사람?" 하고 주변에 물어볼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거기다가 스탈린 본인도([[레프 트로츠키|트로츠키]]와는 달리) 스스로도 내성적이라 나서기를 꺼렸고, 이러한 정황이나 훗날 권력에서 밀려난 트로츠키가 스탈린을 눈에 안 띄는 듣보잡 정도로 묘사한 것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면서 한때 스탈린이 혁명 중에 한 일이라곤 없는 그저 '''레닌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주된 묘사였으며 위에서 봤듯이 심지어 프락치라는 의혹도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저술한 스탈린 전기에 나온 것처럼 잉여 인사가 아니라 오히려 은행강도 등으로 단련된 도시 뒷골목 어둠의 세력과의 커넥션으로 레닌의 망명이나 자금 동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주요 당대회에 참석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상기했듯이 스탈린은 프라우다의 첫 편집장이었으므로 언론 활동으로 지명도도 쌓여있었다. 1917년 혁명 직후 열린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선거에서 스탈린은 레닌, 지노비예프의 뒤를 이은 3위의 득표율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는데, 비록 이 중앙위원회 선거는 트로츠키가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스탈린이 혁명가로써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레닌, 트로츠키처럼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뿐만이 아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혁명가는 아니었을지언정 적어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는 나름 저명 인사였던 것. 혁명가로써 세운 공도, 지명도도 기존의 통설과는 달리 높다고 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10월 혁명]] 당시 레닌과 볼셰비키 간부들이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정부의 탄압을 피해 해외로 망명을 간 상황에서 임시적으로 러시아 국내의 볼셰비키 대표를 맡았다. 이 입장에서 스탈린은 무장 봉기를 반대했는데, 레닌의 의중이 무장 봉기에 있다는 것을 알자 입장을 급격하게 바꿔 무장 봉기를 지지한다. '''그리고 이것은 스탈린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된다.''' 당초 무장 봉기를 반대했지만 스탈린의 입장상 정상참작이 가능했던 반대였고, 이 입장도 급격히 바꿔 무장 봉기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것에 비해 당 내 유력 지도자였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아예 '''당 밖으로 무장 봉기 사실을 폭로해 버리는''' 자폭을 한다. 후일 [[러시아 내전]]에서 물불 가릴 것 없었던 레닌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의 폭로를 불문에 부치지만 이 둘은 레닌에게 단단히 찍혀버렸다. 물론 10월 혁명의 가장 큰 수혜자는 레닌과 함께 무장 봉기론을 처음 제기한 트로츠키였지만, 스탈린 입장에서는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라는 두 거물이 차기 대권에서 사실상 탈락한 것은 큰 소득이었다. 이때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다수파의 중앙위원회 정치국를 혁명 직후 재선출했는데, 레닌, 스탈린, 스베르들로프[* [[미하일 칼리닌]] 이전 진짜로 국가수반 역할을 하던 소비에트 러시아의 [[주석]]이다.], 트로츠키 단 4인만이 뽑혔고 스탈린은 이때부터 사실상 소비에트 러시아의 최고 권력자 중 한 명으로써 자리매김했다. 당시 레닌과 독대를 할 수 있는 두 명이 러시아 내에 존재했는데, 한 명이 트로츠키이며 다른 한 명이 스탈린이었다.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고 러시아 내전이 벌어지자, 스탈린은 붉은 군대의 [[정치장교]]로 입대하여 직업군인의 충성을 감독하고 동향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흔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군사적 재능은 있었다고 한다. 스탈린은 내전 초기에 남부전선으로 파견되었고, 백군의 반격으로 [[볼가강]] 인근의 차리친, 후에 [[스탈린그라드]]가 될 도시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업무를 보게 된다.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심어둔 구 제국군 장교들과 불화를 빚었고, 자신의 명령을 잘 듣지 않는 몇몇을 경질시키고 체포한 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남부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군 전체를 통솔하는 모스크바의 트로츠키는 당연히 이런 스탈린의 행동에 격노하였고, 스탈린-보로실로프 라인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며 이 문제를 둘을 중재할 능력이 있는 레닌에게 직접 가져가기에 이른다. 레닌은 스탈린을 모스크바로 불러들이고 보로실로프를 우크라이나로 보내 트로츠키의 불만을 일단락시켰다. 스탈린은 1918년 6월 차리친(이후 스탈린그라드, 현재 볼고그라드)으로 파견되어, 병력을 지휘했고, 그 해 10월 우크라이나 전선의 군사회의에 위원으로 임명됐다. 당시 스탈린의 임무는 [[독일 제국]]이 만든 [[우크라이나국]]을 전복시키는 것이었으며, [[알렉산드르 콜차크|콜차크]] 부대의 전진으로 인해 우랄 지방의 상황이 극적으로 나빠지자 12월에 스탈린은 제3군대의 파국적 상황을 종식시키고 무능한 인민 위원들을 숙청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받고 파견됐다. 1919년 5월에는 [[니콜라이 유데니치|유데니치]] 군대에 대항하여 페트로그라드의 방어를 지휘하기 위해 전권을 부여받고 또 다시 파견되었으며, 1919년 10월부터 1920년 3월까지 남부 전선에서 적군을 지휘했고 데니킨을 격퇴시켰다. 거기에 갓 건국된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가 붉은 군대의 침공으로 멸망 직전에 놓인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우크라이나]]를 원조하기 위해 벌인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때, 스탈린이 지휘-감독하던 붉은 군대는 폴란드군에게 [[바르샤바 전투(1920년)|역관광당해 대패했고]][* 트로츠키의 회고록에서는 이 패배를 권한을 넘어선 스탈린의 지휘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으나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트로츠키도 패배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현재의 유력한 설이며, 이 패배는 [[http://pkka1918.egloos.com/m/1194307|스탈린의 책임은 아니라는 것]]이 오늘날의 연구 결과이다. 폴란드 주변의 혁명 운동을 퍼뜨리고 폴란드 내의 소수민족에 대한 혁명 고취를 위해 잘 나가던 진격을 무리하게 옆으로 돌리게 한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라는 분석이 있는데, 이 명령은 레닌이 거의 억지로 밀어붙여서 만든 당 차원의 권고였고 민족 문제에 정통한 스탈린은 여기에 반대했다가 레닌이 폴란드 침공을 강하게 주장하자 찬성으로 돌아섰다. 트로츠키는 강하게 반대한 축이었다.], 소비에트 러시아 측에게 우세했던 전쟁 양상은 폴란드 측으로 흐른다. 이러한 이유로 국방장관 트로츠키와 전선사령관인 [[미하일 투하쳅스키]]와는 사이가 엄청나게 나빠지고, 이 때문에 스탈린은 군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폴란드와의 전쟁을 스탈린의 책임으로 100% 물어버리고 당 차원의 추방을 논한 사람이 바로 트로츠키였다. 트로츠키는 이전에도 스탈린을 탐탁찮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 이후 스탈린은 정부로 돌아가서 '''소수민족 출신'''이라는 메리트를 강조하여 민족인민위원[* 당시 인민위원은 오늘날로 따지면 장관을 의미한다.]에 취임하였다. 원래 정권을 잡기 전까지도 스탈린이 남들에 비해서 비교우위를 갖는 분야는 소수민족 문제 분야였고, 실제로 민족 문제 관련 일을 많이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 자리는 스탈린에게 상당한 이득을 가져다 줬는데, 소수민족 출신의 공산주의자들을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포섭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스탈린은 교묘한 정치적 책략과 소련 내 민족 업무에서 보여준 과단성 등으로 세력을 키워나갔고, 여러 업무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면서 능력과 식견을 뽐내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 당시 [[니콜라이 부하린]]과는 민족 문제와 관련된 저서를 만들 때 도움을 주며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1922년, 스탈린은 마침내 공산당의 조직 기강을 내세우기 위해서 신설된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서기장]]에 선출된다. 이때 레닌은 자신이 과거 10차 당대회에서 금지했던 종파 결성조차도 서슴지 않아서 몰로토프가 깜짝 놀라기도 했다. 훗날 스탈린은 서기장을 사실상 공산당의 수장으로 만들고, 이에 따라 전 세계 공산당에서 서기장 혹은 제1서기가 당의 수장인 것이 명약관화해지지만 당규약에 서기장의 당의 지도자라는 명확한 규정은 나중에도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서기장 = 당수 시스템이 공산권 전체에 자리잡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헝가리, 폴란드, 중국, 베트남, 북한은 당중앙위원회 위원장(혹은 주석)을 당수로 내세운 적이 있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는 나중에 서기장 제도를 폐지하고 당중앙위원회 총재로 대체하였다.] 당시 서기장 직함을 만든 이유는 어디까지나 공산당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조직 행정 문제를 효율화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이때까지만 해도 서기장은 중요한 자리긴 해도 공산당의 수장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서기장이 되는 걸 이미 스탈린에게 중요한 자리가 너무 많으니 위험하다고 여겨 반대했으며, 스탈린이 서기장에 선출되고 나서는 행정업무만 처리하는 사무원에 불과하다고 막말을 퍼부어댔지만 그냥 분에 이기지 못해서 나온 인지부조화에 가까웠고 서기장은 중요한 자리가 맞다. 그러나 훗날 다니엘스를 비롯한 학자들이 주장한 대로 스탈린이 서기장 자리에 앉아서 공산당 내부에 자기 측근들을 잔뜩 심어서 당을 장악했다는 주장도, 당시 공산당의 조직 기강은 너무 무너져 있어서 서기장에 앉는다고 그런 일을 할 수 있었겠느냐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의문시되고 있다. 스탈린이 수행한 지방당에 대한 통제 강화와 기존 인사의 해임, 신규 인사의 임용 과정은 스탈린 개인의 의사보다는 중앙 정부의 힘을 강화하려는 소련 수뇌부의 명령을 스탈린이 이행한 것에 가깝다는 평도 있다. 어쨌거나 스탈린의 서기장 취임 한 달 만에 레닌은 러시아 내전에서 겪은 총격 후유증과 지병으로 쓰러진다. 레닌은 뇌일혈로 반신불수가 되면서 와병 중이었기 때문에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이때 스탈린의 억압적인 정치 성향과 거친 성격이 드러나게 되어 스탈린은 레닌에게 상당한 반감을 산다. 이를 두고 레닌이 스탈린의 성격을 정확히 꿰뚫어봤다는 평가가 나중에 스탈린 격하가 한때 주류로 자리잡으면서 흥했지만, 사실 레닌이 스탈린의 본성을 꿰뚫어봤다기보다는 레닌의 지나치게 배타적인 성격이 드러난 것이다. 이 때문에 레닌은 트로츠키와 반목하기도 했고, 카메네프나 지노비예프와도 으르렁댔고 부하린도 기계론자라고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절대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시켜주지 않았다. 스탈린도 레닌의 말년에 슬슬 머리가 굵어지면서 레닌의 주장을 반박하기 시작하자 레닌이 뿔이 나서 막말을 퍼부은 것에 가깝다. 사실 레닌은 말년에 중병으로 좀 맛이 가면서 자살을 하기 위해 독극물을 가져오라고 애원하는가 하면, 당 지도부 대부분을 쫓아내야 한다는 둥, 각종 질병으로 골골거리던 당 지도부를 치료하는 외국 의사들을 추방해야 한다는 둥 말도 안되는 주장을 일삼아서 당내에서 반감을 사고 있었다. 어쨌거나 레닌은 죽기 전 써둔 유언장에서 "스탈린 동지는 너무나 잔인하고 성격이 급하다. 그의 성격은 서기장 자리에 맞지 않다. 그러므로 서기장에서 해임하라"라고 써놨다. 그러나 레닌은 후계자에 대해 암시적이고 모호한 표현만 했지 아주 명백하게 후계자 지명을 언급하지는 않아서 문제가 되었다. 거기다가 레닌은 이 유서를 엄중히 봉인하여 비서에게 맡겼는데, 그 비서는 하필 스탈린의 후처 나댜 알릴루예바였고 이 때문에 스탈린은 레닌의 유서에 대해 알아버렸다. 혁명의 1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트로츠키는 영웅주의적으로 보이는 성격과 때문에 당 내 유력 주자들의 시기와 견제를 끊임없이 받았고[* 실제로 러시아 혁명 당시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혁명]]을 본보기로 행동했는데, 군인 출신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이 제정을 세워서 혁명 정신에 역행한 것을 보면서 '아 우리도 군인들을 가만 내비두면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하여 태생부터 군인에게 별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보나파르트주의자라고 소련에서 까인 군사 관련 인물이 한둘이 아닌데, 투하쳅스키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스탈린이 사임하면 트로츠키에게 서기장 자리가 돌아갈 판이었다. 그래서 정치국 위원들은 다소 만만하게 보이는 스탈린의 사임을 반대했다. 그래서 이 유언장은 스탈린이 주재하는 정치국 회의에서 공개하지 않기로 했고, 이는 30년이나 지나서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에 와서야 공개될 수 있었다. 이때 스탈린의 유임을 강력히 주장한 혁명가들 대부분은 [[대숙청]] 때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처형되었는데, 이땐 많은 이들이 스탈린의 본질을 깨달았으나 그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레닌의 유언장은 스탈린에 대한 가혹한 평가와 트로츠키에 대한 전체적 호평, 그리고 약간의 단점과 '''그 부분을 다른 동지들이 보좌해서 채워달라는''' 언급을 하고 있다. >스탈린 동지가 서기장으로써 무제한의 집중된 권력을 쥐게 된다면, 그 권한을 주의깊게 사용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반면 트로츠키 동지는 (중략) 개인적으로 '''가장 현재 중앙위원회에 적합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과도한 자만심을 보였고 문제의 순 관리적인 작업[* 이 표현은 당시 러시아 혁명가들이 사용하던 일종의 관용구라서 관료적인 작업이라고 오독하기 쉬운데, 사실은 오히려 절차적 정당성을 중시하는 관료주의와는 반대 개념에 가깝고(관료주의는 오히려 서기장 스탈린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문제나 갈등을 그 배경과 상황에 맞춰 순리에 따라 차근차근 해결하지 않고 문제 자체만 관리해서 해결하려 드는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트로츠키의 특징에 비춰서 설명한다면 트로츠키가 볼셰비키 내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라는 건 레닌도 알고 트로츠키도 아는 사실이었으므로 당연히 트로츠키의 주장이 대체적으로 옳고 다른 주장은 틀린 것일 수밖에 없으니까 굳이 토론이니 공감이니 합의니 하는 데 시간 낭비할 것 없이 그냥 아가리 파이트로 상대를 밟아버리고 자기 주장대로 하게끔 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 >레닌의 인민위원회에 보내는 유언장 중 1922년 12월 24일 작성된 부분 >조지아 쪽의 일들은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입장에서 접근한다면 극도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며, 사려깊음과 준비성을 가지고 필요사항에 대해 절충안을 이끌어내야 한다. 하지만 조지아인(스탈린)은 이런 문제에 대해 무지한 모습을 보여줬고, 마구잡이로 남들을 '국수주의적 사회주의자'[* 소수민족의 입장을 소련의 이익보다 앞에 놓는 것. 쉽게 말해 '''소비에트 밑으로 안 들어오는 놈들은 맞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깡패스럽고 폭압적인 논리로, 당시 소수민족위원회 의장이었던 스탈린이 남을 비난할 때 남용하던 단어다. 심지어 조지아는 스탈린의 모국이었다.]라며 비난하고('''사실은 그 자야말로 진정한 국수주의적 사회주의자이며, 대러시아주의에 물든 천박한 깡패 놈이다.'''), 사실상 노동자 계층의 단결을 저해하고 있다. 노동자 계층의 단결을 가장 크게 해치고 그를 무너뜨리는 요소는 국가의 '부당함'이며, "피해를 본" 민족들은 평등하다는 느낌과 그 평등에 대한 침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 특히 그게 과실이나 기만, 그것도 바로 그들의 노동자 동지들에 의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게 바로 내가 이 건에서 소수민족들에 대해서는 많이 양보하고 관대하게 대할수록 좋다 말하는 이유다. 이게 바로 이 건에서 노동자 계층의 근본 권리를 위한 투쟁에는, 단순히 형식적인 태도가 아니라 억압받는 소국의 노동자의 편에 서서 억압자 대국을 대하는 태도에 입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레닌은 좀 더 그들을 달래가며 타협을 해가야 한다고 느낀 것이고, 그런 문제에서도 폭압적이며 잔인한 모습을 보이는 스탈린은 지도자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다.] >---- >레닌의 국가와 '자치화'에 대한 서한. 1922년 12월 31일[* 조금 더 나중 시점에 쓴 서한에서는 스탈린은 소련의 소수민족 문제에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함께 계속 종사하도록 해야 한다고 언급하긴 했지만, 이 평가를 보면 대강 레닌이 스탈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답이 나온다.] 스탈린에게 혁명 영웅 트로츠키는 눈엣가시였고, 전 세계의 공산화를 이룩해야 공산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는 영구혁명론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에 맞서 러시아 단독으로도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일국 사회주의론을 펼쳤다. 다만 트로츠키는 거만한 태도 때문에 스탈린 말고도 적이 많았다. 후일 외무장관에 취임하여 '몰로토프 칵테일'이라는 단어가 생겨나게 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경우 2차 대전 당시 연합국과의 외교 관계를 담당하게 되는 거물이 되지만 당시엔 윗사람에게 고분고분하고 근면한 것 외에는 장점이 없는 관료에 불과하다면서 트로츠키가 대놓고 몰로토프를 조롱하였고 이에 몰로토프는 부들부들 떨면서 '''"동무, 모두가 (동무처럼) 천재가 될 순 없소."'''라고 대답하는 일도 있었다. 트로츠키는 공사 구분이 매우 철저했기 때문에 사적인 자리에서는 상당히 신사적이고 친절해서 미국인 공산주의자 맥스 이스트먼 등은 트로츠키를 만나보고 빠가 되기도 했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트로츠키는 가히 악마적 필설로 상대의 주장을 비판하곤 했다. 이 때문에 [[펠릭스 제르진스키]]는 정치국 회의 석상에서 트로츠키의 면전에 대고 "나는 동지가 두렵다."라고 하였으며[* 이에 대한 트로츠키의 대답은 "나는 동지가 두렵지 않다."였다.],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도 트로츠키는 대면할 때는 예의바르지만 펜을 쥐면 악마가 된다고 평가했다. 얀 루주타크는 트로츠키와 논쟁하던 중 "트로츠키 동지. 나는 그대가 똑똑한 머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 머리의 소유주가 당신 같은 무뢰한이라는 것이 유감이군요."라고 쏘아붙이기도 했다. 이러한 연유로 트로츠키의 인기는 영 메롱했기 때문에 1921년 3월, 10차 당대회에서 트로츠키는 중앙위원회 선거에서 명망에 비해서 형편없는 순위인 10등밖에 못할 정도였다. 그런 반면 그 당시 좀 만만한 감이 있었고[* 후일의 이미지에선 전혀 틀린 말이지만, 이 당시의 스탈린은 그냥 평판은 좋은데 말이 없고 존재감도 그다지 없는 사람이었다.] 겸손하고 상식적이라는 인상을 주변에 주고 있던 스탈린은 혁명 동지들에게 마치 모두의 합의를 도출할 만한 좋은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다만 스탈린이 무색무취한 일벌레라는 것은 트로츠키의 일방적인 주장에 가깝고, 스탈린도 열렬한 토론을 꽤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서류 작업에 싫증을 내면서 일하다 말고 탈출하기도 하였다. 레닌은 애초에 스탈린에게 경계심을 품다가, 볼셰비키가 초심을 잃고 소련의 군소 가맹국들에게 깡패스러운 면모를 드러내는 것을 경계하고 반성하던 터라 약소국에 가혹한 면모를 내비치는 스탈린을 지도자 자리에 앉힐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레닌은 스탈린을 절대로 후계자로 삼지 않을 것을 암시하는 여러 서찰을 남겼지만, 트로츠키는 아직도 자신이 목숨을 건 권력 투쟁의 장에 있다는 감을 잡지 못했는지 자신이 난타당하는 중앙위원회에 불출석하고 문필 활동에만 전념하면서 스탈린-지노비예프-카메네프 연합을 더러 '정치국 안의 정치국', '중앙위원회 안의 중앙위원회' 운운하며 비난하는 데 열중했으나[* 다만 트로츠키의 주장이 완전히 구라라고 보기는 어렵고, 이미 레닌 시대부터 공산당에서는 [[민주집중제]]에서 민주는 사라지고 수령과 그 측근들간의 밀실 합의가 판을 치고 있었다. 레닌조차도 1922년 11차 당대회 직전 자신이 충복이라 믿은 스탈린을 서기장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자신이 금지했던 종파 결성을 시도해서 몰로토프나 스탈린이 모두 "아 이건 좀..." 이라고 난색을 표하기까지 했다. 스탈린 시기에 가면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고, 당 내 이단아로 왕따당하던 트로츠키 입장에선 정치국에서 뭔 회의를 하려고 오면 다른 정치국원들이 회의 이전에 쑥덕거려서 다 합의해 놓고 그걸 강요하는 꼴이 열불 터지긴 했을 것이다.] 당의 절대적 단합을 호소하던 스탈린 때문에 분파주의자로 몰릴 뿐이었다. 자세한 것은 [[레프 트로츠키]] 문서 참조.[* 정확히 말하면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어떤 사상을 갖고 있다기보다는 그냥 나쁜 놈으로 낙인찍었다.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딱지는 소련이나 동구권 내에서는 그냥 '무지무지 나빠서 타도해야 하는데 파시스트나 자본주의자라고는 부르지 못하는 놈'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트로츠키주의가 극좌 모험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서구권의 트로츠키주의 정당이 극좌 노선을 취했기 때문에 생긴 인식일 뿐이다. 이 점은 흐루쇼프와 [[마오쩌둥]]이 서로를 '극우 수정주의자'와 '극좌 모험주의자'라고 공격하면서 '트로츠키스트'라고 매도한 점이나, 노동조합이 국가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한 좌익 반대파를 탄압한 트로츠키의 노선을 스탈린이 '우익적이고 독재적이다'라고 비판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권력 투쟁 과정에서 패한 트로츠키는 처음에는 그냥 시베리아에 유배되었고 최종적으로 소련에서 추방되었다. 트로츠키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자 [[독일 공산당]] 등에서는 트로츠키를 모셔가려고 했지만,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외국에 가서 혁명을 성공시키고 자신의 연속혁명론을 입증하고 영웅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막으려고 이런저런 핑계로 트로츠키를 묶어 놓았다. 당시 스탈린과 협력한 지노비예프는 트로츠키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오히려 추방으로 처리했는데, 트로츠키가 아무리 실각했다고 해도 트로츠키의 영향력은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추방당한 후에도 반스탈린 활동을 계속 펼치자 훗날 [[멕시코]]로 요원을 보내 암살하기도 했다. 대체로 스탈린에게 숙청된 인물들은 흐루쇼프에 의해 대부분 복권되었지만, 자신이 세운 소련 체제를 "퇴보한 노동자 국가"라고 주장한 트로츠키는 흐루쇼프도 외면했고 암살자 라몬 메르카데르에게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하기도 했다. 트로츠키는 결국 [[소련 붕괴|소련이 망할 때까지]] 복권되지 못했다. 이후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몰아내는데 협력한 지노비예프-카메네프와 손을 잡고 트로이카 체제를 수립했지만, 이번에는 지노비예프-카메네프와 스탈린의 사이가 삐걱거렸다. 이들은 트로츠키가 주장한 당 내 민주주의 문제를 들고 와 스탈린을 비난했고, '부자 되시오' 발언으로 충격을 안긴 부하린 역시 스탈린을 자본주의를 우습게 안 인간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미 나가리된 트로츠키까지 끌어들인 지노비예프-카메네프 연합은 스탈린-부하린 연합에게 다시 분파주의자로 몰려서 신명나게 두들겨 맞고 나란히 당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최종적으로는 부하린까지 몰아내는데 성공했고, 마침내 당 내의 유일 지도자로 자리를 확고히 하였다. 스탈린은 권력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무척이나 영민하게 행동했다. 앞선 경쟁자들이 트로츠키를 몰아내기 위해 연합했을 때 처음에는 침묵했고, 다른 경쟁자들은 스탈린에게 연합하여 트로츠키를 몰아내자고 의견을 물었다. 외적으로는 스탈린은 정적 숙청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으나, 실질적으로 경쟁자들을 몰아내는 결정을 하는 권력은 스탈린에게 쥐어진 셈이었다. 이후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가 연합하여 부하린의 사회주의 우파 세력과 대립하자 스탈린은 부하린을 지원했다. 하나씩 하나씩 정적을 지능적으로 치워버린 스탈린은 이후 대숙청을 실시하여 이렇게 권력 투쟁 과정에서 자신에게 한 번이라도 밉보인 인간들은 모조리 트로츠키주의자나 파시스트 첩자로 몰아서 처형했다. 심지어 스탈린과 가까운 사이였으며 옆집에 살던 부하린마저도 총살로 생을 마감했다. 소련의 지도적 혁명가들은 스탈린을 잘못 평가한 대가를 죽음으로써 치르게 되었다. 어쨌든 이 유언장으로 인해 스탈린은 자신의 영웅이며 모범이었던 레닌으로부터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한 셈이 되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레닌을 믿고 따랐던 스탈린은 레닌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고, 누군가를 완전히 믿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터득하게 되었다. 레닌의 유언장이 공개된 중앙위원회에 참석했던 한 당원은 후일 이렇게 회상하였다. >모든 사람은 심한 당혹감에 마비된 듯했다. 단상 위에 앉아있는 스탈린의 모습은 그렇게 작고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 >나는 그를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애써 자제하는 듯 태연한 모습을 보이고자 했지만, 그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음은 명백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